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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한국에서 유독 '더러움'을 묘사하는 것을 엽기적으로 꺼리는 걸까? 노보우의 성(2011), 킹덤 오브 헤븐(2005), 남한산성(2017), 안시성(2018)에서 묘사되는 전장의 더러움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콕 집어서 말하기는 힘든 어떠한 간극이 있다는 느낌이다. 더러움이 빠진 전장은 놀이 같은 느낌인데.
씨앗판 《호빗》 재독하면서 드는 생각 (6)
반지를 낀 빌보가 골룸을 연민하여 죽이지 않고 탈출한 짧은 장면, 이 한 장면을 수백 페이지로 확장시킨 것이 바로 반지의 제왕의 골격이 아니었을까. 악인에게 베푼 연민이 결국에 선의 승리로 돌아온다는 주제는 골룸과 그리마를 통해 변주되고 반복된다.
군복 차림의 조선 선조
Seonjo of Joseon, 1597
軍服を着た朝鮮宣祖
이번에 초초혼@chochohon님께서 그려주신 실록을 바탕으로 상상한 선조의 모습입니다. 소매가 좁은 직령포에 민소매 형태의 답호를 덧입은 모습이 후기 군복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구체적인 고증 코멘터리는 블로그를 확인해주세요.
천고에 듣지 못한 흉변이 우리 동방예의지국에 이르러 영남의 뭇 고을이 바람만 듣고 흩어지니, 석권의 기세가 이루어져 난여가 파천하고 생령은 어육되고 삼경이 함락되며 종사가 버려졌다. 우리 삼도수군은 의기를 떨쳐 목숨을 바치려 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기회가 적당치 않아 뜻을 펼치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독산성 전투의 세마대 전설도 뭔가 원전이 있을 것 같은데… '산 위에 물이 부족해서 허장성세를 했다'는 점에서 일단 생각나는 것은 고구려 대무신왕이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보낸 이야기(삼국사기). 문화라는 게 유통되는 것이니 중국에도 뭔가 비슷한 이야기가 있지 않았을까?
<단령포의 기원 단상>
서주 시대의 중임포는 거꾸로 초기 주나라가 얼마나 서방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전국시대에 이르면 중임포는 퇴화하여 흔적기관이 되었다가 결국 사라지게 된다.
(1) 하남성 낙양 출토
(2) 중산국 유물
(3) 프리어 미술관 소장
(4) 증후을묘 편종 장식
고려시대의 회화자료를 참고하면, 고려의 조복(朝服)은 송과 비교해 사소하지만 일부 차이점이 보입니다. 특히 주목되는 지점은 대대의 신(紳)에 둥근 추를 달아서 폐슬 아래로 늘어뜨린 점인데요. 이것은 고려의 조복이 당제(唐制)를 기반으로 송제(宋制)를 참작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중국에서 당나라 조복 복원한다고 그린 것과 한국에서 고려시대 조복 복원한다고 그린 것 모두 언뜻 보기에는 감탄 나오게 그럴듯하지만, 정작 뜯어보면 기초적인 차원에서 고증오류를 범해서 얘네들 자료조사도 제대로 안 했구나 하는 한숨만 나오게 만든다. 이게 최선이라고? 결코 최선일 리가 없다.
삼국지의 초선(貂蟬)은 초선관, 정확히 말하면 초선농건(貂蟬籠巾)이라고 부르는 물건에서 따왔다는 말이 있습니다. 초(담비)는 담비꼬리를 꽂는 것에서, 선(매미)은 매미 모양의 장식을 붙이는 것을 가리키는데요. 정작 삼국시대에는 독자적인 관모가 아니라서 '초선농건'이라 부르지를 않았습니다.